3부.  시속 150킬로미터

 

  12월 13일.
 이지훈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C 전자의 천안 연수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막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지훈은 점점 자동차의 속도를 높였다. 열어놓은 창문에선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는 바람 때문에 헝클어진 머리를 그대로 둔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뭔가 비현실적인 기분이었다. 12월에 부는 시베리아 북서풍에도 흰색 면봉 같은 몽우리가 올라오기 시작한 목련과 활짝 핀 개나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고 있는 차에서 그것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지훈의 검은색 중고 소나타 뒷좌석 왼쪽에는 강의 때 갈아입을 양복 두 벌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뒷좌석 오른쪽에는 두 장의 화이트 셔츠가 걸려 있었다. 모두 현정이 백화점 세일 기간에 산 것이었다. 차 트렁크에는 오랫동안 신어 뒤꿈치가 닳은 뉴발란스 운동화가 있었다.
 턱 아래까지 올라오는 이세이 미야키의 검정색 터틀넥 풀오버, 리바이스 501, 뉴발란스의 그레이 992, 어디선가 익숙한 듯 보이는 이 조합은 1998년 이후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스티브 잡스의 컨퍼런스 옷차림이었다. 지훈은 그것이 새 제품을 출시할 때마다 전의를 불사르기 위해 그가 입는 전투복이라고 생각했다. 
 H 그룹에서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내 인생의 롤 모델’ 교육을 하다가 지훈은 스티브 잡스의 컨퍼런스 옷차림을 흉내 냈다. 그의 왼쪽 시력은 1.5에 가까웠지만 그는 가끔 도수 없는 안경을 썼다. 안경은 잡스가 착용한 것과 비슷한 것으로 도쿄 출장길에 오모테산도힐즈의 한 안경점에서 산 것이었다.
 모두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동영상을 보다가 발동한 특유의 장난기로 시작된 일이었다. 실제로 종종 지훈의 의도가 성공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는 점점 그 일에 흥미를 느꼈다. 누구도 못 말릴 신경질과 강박적인 식습관, 췌장암에 걸린 것만 빼면 잡스는 여러모로 닮고 싶은 인물이었다.
 반짝이는 정장용 구두를 벗어 던지자 다소 차갑게 생긴 그는 재미있는 일을 도모하는 엉뚱한 천재 타입의 남자처럼 보였다. 동그란 안경을 쓴 것도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지훈은 Y 마트 판매 사원들을 상대로 하는 감정노동 교육에선 캔 커피와 초콜릿 쿠키 상자를 가득 넣은 커다란 마트용 쇼핑카트를 끌고 나왔고, 점심 후 피곤해하는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나누어주며 근무 환경에 대해 대화했다. 그는 강의할 장소의 화장실에서 얻는 정보가 얼마나 유용한지도 금세 알아챘다. 아이패드와 스마트폰, 바퀴가 달린 여행용 플라이트백, 등산용 배낭과 가발 등은 그의 강의 소품이 되었다.
 이지훈은 기업 강연계의 슈퍼스타가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출생 환경과도 무관치 않은 일이었다. 지훈은 언제나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쉬운 단어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딱딱한 강의에 적절히 유머를 섞었고, 쉬운 비유와 많은 예를 들어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선 늘 젊은 남자가 여자들에게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질문을 받았다.
 “애인 있으세요?”
 “결혼하신 건 아니죠?”
 그때마다 지훈은 웃으며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시켜주실 겁니까?”라고 가볍게 질문을 피하며 되물었다. 서비스센터 직원 가이드북에 나오는 ‘고객에게 친절하라’는 첫 번째 고정 매뉴얼 같은 말이었다.

 

 

 지훈이 다니는 회사의 남녀 성비율은 7 대 3 정도로 남자들이 많았다. 회사 내의 연애가 전적으로 여자들의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2020년이 되면 여자가 없어서 결혼 못하는 남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아질걸? 남녀 성비의 불균형이 별로 해소되고 있지 않잖아? 한민족 단일국가설은 이제 끝났어. 철저한 부익부 빈익빈이야. 정글이야, 정글! 우리 회사만 해도 절대적으로 그렇고.”
 마흔넷이 넘도록 미혼인 최 부장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엉뚱하게 비꼬아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비해 여자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이 맞든 틀리든 남아선호사상이 극에 달하던 시대에 태어난 최 부장이 막 딸을 선호하기 시작한 시대에 태어난 여자와 결혼하길 원하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는 룸살롱에 가는 대신 계절마다 머리를 염색하고 ‘소녀시대’나 ‘빅뱅’의 브로마이드를 모으는 별난 중년이었다. 
 그가 ‘싱싱한 난자’나 ‘젖’ 같은 단어를 들먹일 때마다 지훈은 마트의 신선야채 코너나 정육 코너에 진열된 젓갈들을 떠올렸다. 창립기념일에 회사가 직원들에게 최고급 젓갈 세트를 선물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지훈은 꽤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결국 그는 부엌에서 커다란 명란젓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요리를 고민하다가, 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마 생선알도 못 먹는 거야? 난 명란젓 진짜 좋아하는데. 명란젓은 좋은 참기름을 뿌려 먹는 게 최고야!”
 지훈은 젓갈 세트를 몽땅 들고 현정의 집으로 갔다.
 그녀는 먼저 압력밥솥에 밥을 뜸 들였다. 그리고 금방 한 뜨거운 밥 위에 가위로 자른 명란젓을 올려놓고, 그 위에 참기름을 뿌려 천천히 밥과 섞기 시작했다. 곧 부풀어 있던 밥 알갱이가 오톨도톨한 명란과 섞여 보기 좋은 핑크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현정은 몇 번이나 “네 인생이 식도락과 거리가 먼 건 진짜 비극이야!”라고 말하면서 지훈을 놀렸다.
 요리를 좋아하는 현정은 지훈을 위한 음식도 만들었다. 명란젓과 신선한 올리브와 파프리카를 넣은 샐러드, 그리고 지훈을 위해 명란을 익혀서 만든 오므라이스였다.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을 뿌리며 지훈이 말했다. 
 “싱싱한 난자를 먹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싱싱한 정자를 먹는 맛이 어떤지는 내가 좀 아는데. 전문가 입장에서 알려줄까?”
 현정이 명란젓을 포크로 콕 찍어 올리며 지훈을 바라봤다. 지훈은 “좋아”라고 말하다가 참기름 때문에 번들거리는 현정의 입술을 보며 큰 소리로 웃었다.
 저녁을 먹은 후, 지훈이 설거지를 했다. 현정이 함께 볼 DVD를 고르는 동안 지훈은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냉장고에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냈다.
 지훈과 현정은 <위기의 주부들>의 6시즌 7화를 보다가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다.
 정자의 맛을 음미하는 섹스의 만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현정은 침대에, 지훈은 구부러진 소파의 모서리에 머리를 대고 자고 있었다. 지훈은 현정의 입가에 하얗게 말라붙은 침 자국을 바라보았고, 현정은 왼쪽으로 칼잠을 자느라 쿠션의 격자무늬 자국이 잔뜩 찍힌 지훈의 왼쪽 뺨을 바라보았다. <위기의 주부들> 1, 2, 3, 4, 5시즌을 함께 본 연인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른 아침의 풍경이었다.
 <위기의 주부들> 2시즌을 볼 때 이들은 서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3시즌이나 4시즌의 절반이 지나갔을 때쯤, 그것이 현정에겐 엄마 이야기이고, 지훈에겐 형과 관련된 일이라는 사실이 거의 확실해졌다. 언젠가부터 이들은 의도적으로 엄마와 형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소하지만 각자 싫어하거나 먹지 못하는 것들의 목록이 점점 길어졌다. 현정은 오이를 먹지 못했고, 지훈은 생선을 거의 먹지 못했다. 생선회를 가장 좋아했던 현정은 우유를 마시지 못했지만, 지훈은 눈에 보이는 족족 우유를 마셔 하루 권장량 이상의 칼슘을 우유로 섭취하고 있었다. 싸움을 피하는 법을 영리하게 터득해나갔으므로 이들의 연애 전선에 끼는 먹구름은 소나기를 퍼붓지 않고 근처에 머물다 조용히 지나갔다.  
 다음 날 저녁, 지훈과 현정은 친구들을 불러 프라이드치킨과 산더미처럼 쌓인 치즈 맛 나초를 먹으며 포커를 쳤다. 친구들이 남기고 간 빈 맥주 캔과 먹다 남은 닭 뼈다귀들 속에서도 이들은 <위기의 주부들> 시리즈의 나머지 부분을 함께 봤다. 베드신과 키스신이 난무하는 드라마를 보면서도 섹스는 이미 그들의 주요 레퍼토리가 아니었다.
 이른 아침 지훈은 잠들어 있던 현정을 껴안았다. 현정은 간지러운 듯 웃고 있었지만 팬티를 내릴 때조차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지훈은 고요히 사정했다. 현정은 익숙한 듯 그의 목덜미에 달큰한 침을 발라 부드럽게 키스했다. 지훈은 콘돔을 크리넥스에 싸서 버리고, 출근을 하며 그녀를 위해 원두를 갈아 진하게 커피를 내려두었다.
 그러나 이지훈은 공식적으로 연애를 하지 않는 싱글맨이었다. 기업 강연과 대중 강연을 병행하는 컨설턴트 강사는 연예인과 비슷해서 이미지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회사 방침이었다. 그럴수록 비공식인 일에 대해선 그는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졌다.
 지훈은 시계를 봤다.
 지금 이 속도로 고속도로를 계속 달리면 아직 퇴근 전인 현정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차 안에서 급하게 면도한 턱이 날카로운 바람에 따끔거렸다. 수염이 면도로 약해진 피부를 뚫고 올라올 때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이었다.

 

 

(12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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