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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나면 입구에 놓인 커다란 상자 안에 물건을 넣어주세요.”
검은색 옷을 입고 있던 남자가 말했다.
“상자 속의 물건들을 취합해서 벼룩시장 형태로 다시 전시할 예정입니다. 물건은 이미 예고한 대로 돈이 아니라 물건으로 교환 가능합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은 각자 하나씩 가져가실 수 있고, 책이나 시디처럼 패키지로 묶여 있는 것들은 모두 가져가시면 됩니다.”
교회 입구에 놓인 헌금 상자처럼 보였던 커다란 상자가 레스토랑 입구에 놓여 있었다. 사강이 이곳을 ‘금식기도원’이라 생각했던 것도 헌금 통처럼 생긴 저 박스 때문이었다. 푸른색 벨벳으로 덮인 상자는 사람들이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덮여 있었다. 사람들이 앉은 의자 뒤에는 사강이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한 큰 가방이 있었다. 그중엔 배낭을 들고 온 여자도 있었고, 자신의 손가락에 기념품을 직접 끼고 온 사람도 있었다. 반지를 사면 케이스를 자주 잃어버렸던 사강은 그녀가 케이스를 잃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애인이 준 선물을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이들은 헌금 대신 실연의 기념품을 상자 속에 내려놓았다.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아까부터 사강의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다가와 희미하게 웃었다. 슬픔 속에서도 이들은 함께 밥을 먹었고, 그렇게 먹은 밥을 소화해낼 것이다. 사강은 이제 망설임 없이 가방 속 물건들을 손에 쥐었다. 그것이 자신의 이별을 더 이상 비극적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란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사강은 가방 속의 물건을 꺼냈다.
벼랑 끝에 서 있던 사람들처럼 가방 속 물건들이 상자 안으로 떨어졌다.
 
주최 측에선 식사가 끝나고 휴식 시간이 지나면 영화를 예정된 차례대로 상영하겠다고 말했다. 하루 동안 31층 유리 건물의 지하에 있는 이 조그만 시네마테크는 실연당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할 것이었다.
사강은 극장 입구에 서서 극장 안으로 이어진 문을 바라보았다. 문을 열자 극장 안에 깔린 빨간 카펫이 보였다. 카펫 위에는 붉은색 의자들이 정렬돼 있었다. 어두운 계단을 비추는 가는 불빛을 따라 걸어 올라가자 예고대로 극장 안 좌석 위에 하얀색 상자들이 보였다. 상자는 모두 열려 있었고, 안에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버린 실연의 기념품들이었다.    
사강의 눈에 몇 권의 책들이 보였다.
그녀는 팔걸이가 달린 극장 좌석 사이를 빠르게 걸어갔다. 자잘한 큐빅이 박혀 반짝거리는 작은 귀걸이, 무지갯빛을 내는 유리구슬 목걸이, 이니셜이 새겨진 반지가 보였다. 사강은 반짝거리는 귀걸이 한쪽을 들어 올렸다. 실연의 흔적이 남긴 것들은 어째서 이토록 반짝이는 걸까. 이미 죽어버린 후에도 이 빛들은 왜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걸까. 죽어가는 역에 몰입하는 발레리나의 눈빛에서 가장 큰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과 비슷한 걸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락방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낡은 로모 카메라, 얼핏 제목을 확인할 수 없는 오래된 외국 책, <Black or White>가 들어 있는 마이클 잭슨의 베스트 앨범, 직접 수를 놓은 듯한 플란넬 손수건, 포도 덩굴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 오르골이 보였다. 조금 전 텅 비어 있던 빅토리아풍의 의자와 달리, 극장 안 좌석 위를 물건들이 빽빽이 채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계통 없이 난해한 물건들이 평범해 보이던 극장 안을 특별한 기념품 숍으로 만들고 있었다.
50석이 넘는 극장 좌석에 사람 대신 기념품들이 놓여 있었다. 스물한 명의 사람들이 모두 50개가 넘는 물건을 내놓은 셈이었다. 작은 시네마테크 안이 어떤 기억의 상징들로 가득 차올랐다. 사강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공기를 순식간에 빼낸 진공 상태처럼 머리가 멍했다. 그녀는 누구도 가져갈 것 같지 않은 낡은 물건 하나를 재빨리 집어 들었다.
사강이 잡은 것은 카메라였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반짝이지 않는 것이 이 카메라였다. 사강은 그것을 가방 안 깊숙이 넣었다. 그녀는 출구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이곳에 온 순간부터 사강은 가장 먼저 입장하고, 가장 먼저 퇴장하는 관객이 되기로 결정했다. 이곳에서 상영되는 영화라면, 줄거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긋지긋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입구로 이어지는 극장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남자가 사강을 바라봤다.
내내 경제신문을 읽다가,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남자였다.
남자는 짧지만 명료한 목례를 한 뒤, 기다리는 사강을 위해 ‘열림’ 버튼을 다시 한 번 눌러주었다. 미도의 말이 맞다. 실연당한 사람들끼리 모인 공간 안에서조차 설렘과 떨림이 생길 수 있다. 그녀의 말처럼 전쟁 중에도 극적으로 사랑이 피어나고 기적처럼 아이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렇지 않다면 톨스토이나 헤밍웨이의 작품들은 결코 쓰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사강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녀는 자신의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재빨리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사강은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사방이 나무로 장식된 엘리베이터 문이 믿기지 않을 만큼 천천히 닫혔다. 여전히 남자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슨 말을 꺼낼 듯한 얼굴이었다. 사강은 사라지는 남자의 모습을 사분의 일이나 오분의 일쯤으로 잘려진 몇 개의 그림으로 기억했다.
남자의 손에는 영화관에 오는 수많은 연인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 그들의 즐거움이 그저 영화를 보는 것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걸 의미하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사강은 남자의 손에 들린 커다란 콜라와 캐러멜 팝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확신은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이 남자가 실연당한 사람일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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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도에게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말한 건 거짓말이었다.
사강은 <500일의 썸머>를 세 번 봤다.
사실 사강은 <500일의 썸머>가 무척 마음에 와 닿기까지 했다. “다들 몰라서 그렇지 사실 혼자라는 건 너무 평가절하 된 거야!”라는 주인공의 대사는 자신의 다이어리에 파란색 플러스펜으로 적었다. 사강은 연인이 헤어지는 이 영화의 결말이 결국은 해피엔드라는 것과 실연당한 주인공이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영화는 근사한 목소리를 가져 늘 신도를 몰고 다닐 듯한 목사님풍의 목소리를 가진 중년 남자의 묵직한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된다. 실연당한 어린애쯤은 거뜬히 위로해줄 것 같은 중후한 목소리였다. 실연당한 사람들이 모인 극장 안에는 이제 곧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커다란 글씨의 자막이 뜰 것이다. 
 
이 영화는 허구이므로,
생존 혹은 사망한 사람과 어떤 유사점이 있어도 완전히 우연입니다.
특히 너, 제니 벡맨! 
나쁜 년!

 

정수가 사강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했던 말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쁜 년!”
사강의 일탈은 어느 날 아침 이렇게 시작되었다.
L 항공 스튜어디스인 윤사강은 이날 오전 아홉 시 암스테르담 스히폴 공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보스는 그녀에게 두툼한 시말서를 쓰게 할 것이고, 회사 차원의 엄중한 경고도 주어질 것이다. 그녀가 L 항공을 대표하는 ‘올해의 스튜어디스’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날의 일탈은 보기 드문 희귀 사건으로 남게 될 것이었다.

  

(11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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