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발디의 <봄>이 절정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사강은 하얀 도자기 접시 위의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한 손수건은 방금 전 다림질을 끝낸 것처럼 보드라웠고 아직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사강은 뺨 위에 손수건을 댄 채, 이 모임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동병상련의 느낌을 공유하는 위로와 격려일 리 없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절대로.
따뜻한 음식으로 구성된 세심한 식단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위무하기 위한 모임도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실연을 선언하는 모임이었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우연히 마주치면 인사해요. 제 자리는 저쪽이에요.”
미도가 사강에게 인사하며 뒤돌아섰다.
사강은 미도가 걸어가는 쪽을 바라봤다. 그녀는 한 남자 쪽으로 가볍게 몸을 틀더니 세 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정확히 알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곧 주최 측으로 보이는 사람이 미도를 남자 옆에 안내했다. 사강은 미도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

 

안경을 쓴 남자와 사강은 세 번,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계속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강 역시 남자를 바라봤다. 이럴 땐 상대가 누구든 최대한 무심하게 바라보는 게 효과적이라는 걸 사강은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꼬고 있던 긴 다리를 자연스레 바꾸어가며 들고 온 신문을 읽고 있었다. 그것이 외국계 경제신문이고, 주식과 환율 관련 섹션이라는 걸 사강은 어렵지 않게 간파했다. 소개팅 자리에서 자신이 관리하는 주식 계좌 수를 자랑하던 여의도 증권가 남자가 떠올랐다. 미국과 유럽의 시차 때문에 룸살롱에서 술을 마셔도 주식 장이 파하는 세 시부터 마시고 오후 여덟 시면 술자리를 파하고 퇴근한 후, 이른 새벽에 출근을 한다는 남자였다. 이 남자의 시간이 다른 사람과 달리 거꾸로 뒤집혀 돌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사강은 한두 번 더 그를 만났었다.
남자는 무엇보다 바빠 보였다.
그는 열세 시간의 비행 동안 단 한 순간도 잠자지 않고, 서류를 들여다보며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는 비즈니스석 승객 같았다. 끝도 없이 커피를 마시는 게 그런 비즈니스맨들의 특징인데, 마실 때마다 기내에서 주는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맛없다는 얼굴인 것도 비슷했다. 남자의 두 눈은 열두 시간 동안 컴퓨터만 들여다본 것처럼 충혈되어 있었다. 뺨은 윤기 없이 건조했지만 그것은 실연의 흔적이라기보단 전날 야근을 하거나 숙취로 피곤한 얼굴처럼 보였다. 남자가 쓰고 있는 동그란 안경은 얼룩 없이 반짝였다. 유일하게 실연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면도하지 않은 까칠한 남자의 턱뿐이었다.   
뭐가 바빠서 실연당한 사람들이 우글대는 이런 곳에 와서까지 신문을 보고 있었던 걸까. 혹시 이런 이상한 풍경 스케치가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착각하는 인터넷 신문 기자라도 되는 걸까.  
신문을 보고 있던 남자가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뭔가 메모하기 시작했다.
사강은 남자에게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적개심을 느끼고 있었다. 실연당한 날 아침에도 남자들은 경제신문을 읽으며 그날의 주가 동향을 파악하고 주식 투자를 하는 걸까. 그럴 지도……. 이혼 서류가 접수된 다음 날에도, 여자는 퉁퉁 부은 눈으로 아이를 위해 아침을 만들고 도시락을 싸서 가방에 넣어주는 존재들이니까. 그렇게 이해하면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사강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정수의 얼굴을 보면 늘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강은 그것이 노력하지 않아도 이해되는 관계이길 원했다. 죽도록 노력해야만 겨우 유지되는 것이 사랑일 수 있을까.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고 노래한 건 김광석이었다. 그러나 청바지와 오래된 통기타가 그토록 잘 어울렸던 서른둘의 남자는 청춘의 한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정수에게 샤넬 스카프를 생일 선물로 받던 날, 사강은 그것을 목이 아닌 오래된 가방 끈 위에 묶었다. 목에 매고 있으면 어느 날 그것이 이사도라 덩컨의 스카프처럼 자기 목을 움켜쥘 것 같았다.
미도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연당하지 않은 사람이 이곳에 올 이유는 한 가지다. 사강은 이제 남자가 실연당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심증을 굳혀가고 있었다. 이곳에 온 스물한 명 중에는 미도의 말처럼 자신이 미래의 커플이 될지도 모른단 은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강은 텅 빈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응시했다.
회칠한 하얀색 벽 위에는 커다란 거울들이 걸려 있었다. 거울은 사강이 볼 수 없는 창 너머 반대편 거리를 그림처럼 비추고 있었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드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서 있고, 정류장의 빨간색 지붕이 삼분의 일쯤 잘려 그녀의 동공 위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거울 안으로 네이비색 슈트를 입은 건장한 남자가 빠르게 걸어왔다. 그리고 사강의 눈빛이 거울에 채 머무르기 전에, 남자는 그림 안으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사강은 남자가 걸어갈, 그러나 거울 속에선 보이지 않는 거울 밖 잘려 나간 길들을 상상했다. 
빈 의자 너머, 거울에 담긴 거리 풍경을 사강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남자가 지나가고, 여자가 지나가고, 다시 남자가, 한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자가 지나갔다. 손을 꼭 잡은 연인이 느릿하게 거울 속 길 위를 걷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에 살짝 기댄 여자의 뺨이 햇빛 속에 반짝거렸다.
사강은 행복했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그곳에 앉아 있길 원했다. 그녀는 상냥한 얼굴로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윤사강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랐다. 맞은편 빈 의자에 살아 있던 과거의 정수와 죽어버린 미래의 정수가 있었다. 사강은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녀는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빈 의자를 향해 미소 지었다. 모던한 레스토랑의 인테리어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장식적인 빅토리아풍의 벨벳 의자. 누구도 쉽게 기억해낼 수 없는 오래된 시대를 재현한 모조품 위에 지나간 한 세월이 앉아 있었다.
그것은 부재하는 연인과 함께하는 공식적인 마지막 식사였다.
사강은 미역국을 수저에 가득 담았다가 내려놓았다. 그것을 입술에 대자 정수와 함께했던 기억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 이 고통스런 재판의 피고이자 배심원이 되어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서로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이었다. 이제부터 사람들은 맞은편의 빈 의자가 말하는 바를 묵상할 것이다. 따뜻한 국을 먹고, 밥알을 씹으며. 그것은 불행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둘로 분리되는 것을 조용히 사유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사강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국을 뜨다가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한 채 자꾸 코를 만지작거렸다. 그때마다 그녀의 코는 만취한 남자의 그것처럼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눈물만큼 전염성이 강한 건 없다. 누군가 울음을 참고 있었고, 깊은 침묵이 흘렀다.   
두 번째 메뉴가 나왔다.
그때, 미도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를 끄는 날카로운 소음 때문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일제히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잠시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더니, 곧장 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미도가 의자에서 일어나 남자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이지훈 씨! 잠깐만! 잠깐만요!”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곧장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미도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동요한 몇몇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했다. 미도는 곧장 일어나 달리듯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앞뒤로 흔들리는 문을 바라보다가 한 여자가 큰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사강은 그녀에게 말없이 들고 있던 구겨진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10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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