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회 >

“그렇게 찾아도 없었는데. 정말 놀랍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찾은 거니?”

일주일 후, 지훈은 현정을 만났다.

“내 로모!”

그가 카메라와 함께 내민 것은 그 안에 들어 있던 필름과 사진이었다. 모두 24장이었고, 대부분 햇빛이 들어가 퇴색해 있었다.

“필름에 햇빛이 들어갔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 미안해.”

“아니, 이 사진은 오히려 번져서 더 멋지네. 예술작품 같아.”

현정은 코앞까지 바짝 사진을 당겨 사진 속 장소를 일일이 확인했다. 성산포 앞바다를 배경으로 한 사진 속의 현정은 햇빛 속에 들어가 놀고 있는 작고 귀여운 소녀처럼 보였다. 사진 속에 보이진 않지만 그때 현정은 내내 맨발이었다.

“고마워. 나라면 너처럼 못 했을 거야. 아마 꼭 숨기고 절대 안 줬을걸? 넌 진짜 신사야.”

지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신사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고, 고마울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도쿄에서 사강이 건네주었던 사진은 현정이 애타게 찾고 싶어 하던 제주도 사진들이었다. 사진은 현정이 태어났고, 현정이 유년기를 보냈던 제주도의 바다와 해녀 마을을 담고 있었다. 7년에 걸쳐 찍힌 추억의 지층들이었다.

현정은 자신의 로모 카메라를 바라보며 아이처럼 웃었다. 이 로모 카메라를 보며 든 첫 번째 생각은 현정을 깜빡 놀라게 해주기 위해 ‘간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은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것을 카메라 안에 넣어 ‘처리’해버리는 것이었다. 결국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현정 옆을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 몇몇이 지나갔다. 현정과 눈을 맞추며 웃는 아이들은 예외 없이 “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고 인사했다. 현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 수업이 있어.”

“알아.”

“내가 진짜 고마운 게 뭔지 알아?”

“안다니까.”

현정이 긴 숨을 내쉬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래. 넌 늘 모든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난 네가 얼마나 날 원망했을지도 알 것 같아…… 아무것도 묻지 않아줘서 고마워. 정말이야.”

지훈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멀어져가는 현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정이 뒤돌아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로 시작하는 사랑보단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늘 더 힘들다. 상대보다 힘든 쪽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로 새겨질지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지훈에게 그것은 운동장을 빠르게 뛰는 현정의 뒷모습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미안해’로 끝나는 사랑보다 ‘고마워’로 끝나는 사랑 쪽이 언제나 더 눈물겹다. 현정이 들고 가는 저 사진들처럼. 가끔, 아주 가끔은 지루한 우리의 삶 속에서도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안녕!”

현정이 뒤돌아 배낭을 멘 사진 속 소녀처럼 손을 흔들었다. 지훈은 피식 웃으며 운동장 정중앙을 가로질러 천천히 저 끝까지 걸어갔다. 그래, 안녕.

“여기 오클랜드발 비행기 도착하는 출입구 맞죠?”

사강이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봤다.

“공항에는 오랜만이라, 좀 헷갈리네요.”

선글라스를 밴드처럼 낀 여자가 사강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웃으면 오른쪽 입술 아래 작은 보조개가 팬 여자였다. 많아봐야 마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는 하이힐이 아니라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29번 출구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 도착을 기다리며 열을 맞춰 서 있었다. 하얀색 피켓을 들고 ‘MR LEE’를 기다리는 전자회사 직원과 한 무리의 여행객을 기다리는 여행사 직원과 오클랜드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딸과 아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이 뒤섞여 출입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비행기가 착륙하길 기다리는 것도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여기 맞는 거죠?”

여자가 사강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맞아요. 한 출구로 여러 곳에서 돌아온 비행 승객들이 나오긴 하는데, 아마 기다리시는 분도 이곳으로 나오실 거예요.”

“고마워요.”

여자가 사강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여자는 손목에 찬 시계를 자주 봤다. 전광판에 비행기 ‘도착 지연’ 사인이 뜰 때마다 입술을 깨물었다. 손목에 시계를 차고 다니는 여자를 본 지 오랜만이었다.

“근데 오클랜드발 왜 자꾸 도착 지연이죠? 30분이 넘었는데. 이런 일이 없었던 걸로 아는데?”

“아뇨. 종종 있는 일이에요. 출발하는 공항 대기 시간이나 기상 상황이 늘 바뀌니까 충분히 달라질 수 있어요. 곧 도착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정말로, 참 친절하시네요. L항공사 승무원?”

여자가 사강의 L항공사 마크가 찍힌 크림색 제복을 바라보며 웃었다. 사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에 오면 정말 이상해요. 떠나는 것도 아닌데 진짜 떠날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렇게 보고 싶었던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막상 공항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으면 정말 보고 싶었단 생각이 들거든요. 공항이란 데가 참 이상하죠? 나만 그런가?”

여자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시계를 바라봤다.

“여행가는 것보단 공항 오는 쪽이 더 설렌다고 할까. 공항에만 와도 꼭 여행 다녀온 느낌이라니까.”

여자는 기다리기 심심했는지 즐거운 얼굴로 사강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그랬어요.”

사강이 여자를 바라봤다.

“공항에 오는 게 늘 즐거웠거든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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