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회>

누구에게나 소설의 엔딩이 같을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 소설의 끝은 책의 중간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겐 소설의 첫 페이지 첫 번째 문장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사강에게 『슬픔이여, 안녕』의 엔딩은 소설의 마침표가 끝나는 마지막 문장이 아니었다. 사강은 이 책의 번역자가 쓴 책 말미에 마지막 문장을 보았다. 그때의 아빠처럼 그녀는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젊은 시절의 엄마를 떠나보내며, 어린 딸을 떠올리다가 그가 했을지도 모를 마지막 말을.

* ‘슬픔이여, 안녕’, 여기에서의 안녕(bonjour)은 헤어질 때의 인사(Adieu)가 아니라 만날 때의 인사를 뜻합니다.

사강은 책의 번역자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사라진 아빠의 옛 이름이었다.

*

정전이 있던 날 아침.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사강은 정수와 마주쳤다. 이른 아침이었다. 정수는 사강을 보지 못한 듯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코너를 빠르게 돌아 사라졌다. 하지만 사강은 그가 자신을 보지 못한 게 아니라, 보지 못한 척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고 엘리베이터까지 빠르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기장님.”

지난 일 년 동안 정수를 피해왔던 것과 다르게 사강은 조깅복을 갈아입은 그를 향해 인사했다. 사강은 자신의 아침 인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수는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곧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침묵 속에서 응시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사강이 말했다.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따뜻한 아침 인사를 깊은 침묵으로 응대하는 건 분명 ‘사랑의 역사’의 마지막 장에나 쓰여질 비극이었다. 하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연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성숙한 어른들의 언어인 침묵의 진짜 의미를 아프게 배워나간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보일 리 없는 것들이 보일 때마다, 사람은 아주 조금씩 성장해간다. 침묵 속에서 사강은 멈춰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정수가 엘리베이터에 탄 채 사강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곳에 타지 않았다. 정수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사강은 엘리베이터 밖에서 조금씩 사라지는 정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고 정수가 그곳을 벗어나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손을 흔들었다. 사강은 멈추지 않았다. 정수 역시 닫힌 문 사이로 자신처럼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는 걸 사강은 알 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날 때마다,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릴 때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성장한다. 시간이 흘러 들리지 않는 것의 바깥과 안을 모두 보게 되는 것. 사강은 이제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슬픔이여, 안녕’의 안녕이 ‘굿바이’가 아니어서.

안녕이 ‘헬로우’여서.

다행이었다.

정말.

도쿄 출장에서 돌아온 한 달 후, 지훈은 자신의 오래된 자동차를 중고 매매상에 팔았다. 그의 운전면허는 100일 동안 정지되어 있었다.

도시에 사는 남자가 난데없이 자동차를 팔아 치울 때, 그의 삶은 적지 않은 변화로 몸부림친다. 일명 자동차 금단 현상. 차를 팔아 치운 후, 한 달 동안 지훈은 사람이 미어터지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수없이 발을 밟혔고, 오전 여덟시의 신도림역에서 새로 산 양복의 첫 번째와 세 번째 단추가 동시에 떨어지는 불상사를 겪었다.

언제나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지훈은 버스를 기다리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빠르게 걸으며 서울 시내를 이동했다. 이제 지훈은 자동차를 버리고 서울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게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절약하게 하는지 60분짜리 연설 원고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달리는 기차 안이 책을 읽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것도 발견했고, 버스의 맨 뒷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서울의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알았다.

연수원에 가기 위해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기다리며 지훈은 문득 현정을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여수나 예산 같은 작고 소박한 지방의 터미널에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여유롭게 창밖 풍경을 볼 일도 없었을 것이고, 범칙금 통지서를 여덟 통이나 받는 초유의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차를 팔아버리는 따위의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훈은 ‘볍씨왕’ ‘근사미’ ‘금자탑’ 같은 각종 농약 이름이 적힌 야구 모자를 쓴 늙수그레한 노인들이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올해 사과 작황에 대해 얘기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지훈은 도쿄행 비행기 안에서 만났던 노인을 떠올렸다.

그때, 그 노인에게서 보았던 형의 미래에 대해서도 그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한때 그에게 시간은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에 멈춰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고민 중이었다. 사실 그것은 20만 킬로미터 이상을 달렸던 자신의 애마를 팔아 치우는 것 같은 파격적인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생겼다.

이 모든 게 결국 현정 덕분이었다. 지훈은 이제 끝끝내 미뤄뒀던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훈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예산의 버스터미널 매점 앞에서 현정에게 온 마지막 문자 메시지에 답을 했다.

6개월째 미루었던 일이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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