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강의 이별은 거의 일 년 가까이 이어져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자주 충혈됐다. 그녀는 밭은 재채기를 종종 내뱉었다. 가혹한 봄날이었다. 손수건을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였다. 그러나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손수건마저 정수가 사강에게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그와 연결되지 않은 물건을 찾는 게 불가능해질 즈음, 사강은 실연이 어긋난 뼈를 다시 맞추듯 죽을힘을 다해 자신이 기억하는 모든 사물을 그와의 기억 쪽으로 되돌리는 일이란 걸 깨달았다. 이제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걷던 길에 이런 나무가 서 있었어.
그와 함께 먹던 음식에 이런 토끼 귀 모양의 은빛 스푼이 놓여 있었지.
그는 김광석의 노래를 참 좋아했었지.
그와 함께 보던 영화에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가 흘러나왔어,
난 후회하지 않아, 난 후회하지 않아, 난 후회하지……

 

헤어지길 잘했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이별이 진짜 이별일 수는 없다. 아흔아홉 살에 죽음에 이른 노인의 자연사를 절규하며 슬퍼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강에게 실연은 자신을 향해 스스로 칼날을 겨눈 자살에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그녀는 스스로를 죽이기 위해 칼날을 목 위에 대기 전 자신의 사랑이 죽어가는 과정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를 반복해서 듣던 날 밤, 사강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트위터에 뜬 문장을 읽고 있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아침 먹어주실래요?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

 

그녀는 잠들지 못한 채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으로 바로가기’를 클릭했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영화제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기념품 가게

 

사강은 손가락으로 실연이나 치유 같은 단어들을 쓸어내렸다. 각각의 제목을 손가락으로 클릭하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설명되어 있는 몇 개의 카테고리가 나왔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치유’라는 단어를 클릭했다. 영화제라는 말이 언뜻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500일의 썸머>
<러브레터>
<화양연화>
<봄날은 간다>

 

사강은 세로로 정렬된 영화 제목을 하나씩 클릭했다.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와 촬영 스텝에 관한 정보들이 떴다. 모두 실연당한 사람들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사강은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며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 모임’에서 ‘실연’이란 단어를 클릭했다. 그리고 탈칵, 소리와 함께 새롭게 넘어가는 화면을 지켜보았다. 

 

       실연은 오래  

 

화면이 부유하며 천천히 오른쪽으로 문장을 밀어내고 있었다.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
사강은 이 문장을 몇 번이고 되뇌다가 눈을 감았다.

 

실연은.
오래된.
미래다.

 

눈물이 동공 위로 서서히 차올랐다. 눈을 뜨면 곧 낙하할 뜨거운 웅덩이를 사강은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별은 앞으로 오는 것이다.
그러나 실연은 언제나 뒤로 온다.
이별은 ‘하는’ 것이지만 실연은 ‘당하는’ 것이다. 누구도 ‘이별 당하다’라고 말하거나, ‘실연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실연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감각을 일시에 집어삼키는 블랙홀이고, 끊임없이 자신 쪽으로 뜨거운 모래를 끌어들여 폐허로 만드는 사막의 사구다.  
실연 후, 사강의 현재는 끊임없이 과거 쪽으로만 회귀했다. 과거가 그 모든 시간과 가능성을 빨아들였다. 실연은 기쁨과 슬픔, 회한과 쓸쓸함, 분노 같은 모든 감각들을 거대한 분화구의 화산재처럼 덮어버렸다. 미래 역시 과거와 한 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 치도 나아가지 않은 너무나 익숙한 미래. 실연은 그렇게 사강에게 오래된 미래가 되었다. 
사강은 트위터를 보며 ‘미래’라는 단어를 클릭했다. 곧이어 ‘저랑 함께 아침 드실래요?’라는 문장이 나타났다. 실연이 미래를 낳고, 미래가 아침 식사를 낳고, 아침 식사가 치유를, 치유란 단어가 다시 기념품이란 단어를 밀어 올리며 상처란 명사로까지 옮아가고 있었다. 
실연을 어루만지는 단어들이 겨우 아가미를 내밀고 흘러와 ‘외로움’이란 이름의 호수에 도달해 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그것을 간증했다. 자신의 실연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 회한이 이 조찬 모임에 처연한 색채를 덧씌웠다. 그런 이유로 이곳은 죽음을 앞둔 노인들의 새벽기도회를 연상시켰다. 사강은 가방 속의 물건들 역시 성경책만큼 무겁다는 걸 깨달았다. 
“다들 너무 무거운 얼굴들이에요. 누군가의 죽음을 미리 애도하는 기분이 들구요.”
미도가 말했다.
“헤어진 애인의 상징적인 죽음을 애도하는 거겠죠.”
“이런 분위기면 전 밥 먹다 체할 것 같아요. 소화제 가져올 걸 그랬어요. 꼭 <최후의 만찬> 같지 않아요?”
“예수님 제자는 열 두 명뿐이에요.”
“그런가? 제가 한번 몇 명인가 세어볼까요? 눈치 못 채게 셀 수 있어요.”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기도 전에 미도는 사람들을 나지막이 세어보며 손가락을 꼽고 있었다. 몇몇이 사강과 미도를 바라봤다. 미도는 마침내 비밀을 알아냈다는 듯 만족스런 얼굴로 사강에게 “스무 명이네요”라고 속삭였다.
사강은 미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미도를 포함해 모두 스물한 명이었지만 사강은 고쳐 말하지 않았다.

 

 

(8회에 계속)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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