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5 회

미도의 눈가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의식적으로 어떤 순간을 기억하고 인위적으로 밀어내는 눈물이 아니었다. 허기가 찾아들면 출렁이는 요란한 위의 진동처럼 순수한 내장 반응. 화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미도는 아픔을 느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그것은 그날 아침 미도가 결코 보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영화를 만들던 내내 지독하리만치 운이 없던 대표는 그날 드디어 최고의 배우들을 만난 것이었다. 그들은 배우처럼 눈물을 흘리며 연기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슬픔을 액팅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순수한 눈물 그 자체였다.

“설마, 이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생각인가요?”

그건 질문이 아니라 경고였다.

“영화제라도 출품하시려구요?”

그가 만약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한다면, 미도는 당장 저 필름을 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창문을 열고 그것을 던져버릴 수도 있었다. 대표는 대답 없이 필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작품의 제목이 뭔 줄 아십니까?”

그는 미도를 바라봤다.

“차장님이라면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이라고 말하시겠죠. 그게 정 차장님의 프로젝트 제목이었으니까. 전 아닙니다.”

미도는 그의 눈가를 덮고 있는 자잘한 주름들을 바라봤다. 실연을 경험한 사람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특유의 상실감이 그의 눈가와 뺨 사이에도 번져 있었다. 그는 지쳐 보였지만 동시에 평온해 보였다. 격렬한 섹스를 마치고 난 후 남자들의 눈동자에서 보이는 고요함이 그의 주위를 감쌌다. 그것은 윤사강의 눈물처럼 미도의 가슴을 이상할 정도로 조여왔다. 미도는 주먹을 꼭 쥔 채 대표를 바라보았다.

“실연이 꼭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적용되는 건 아닌 것 같더군요. 우습지만 전 제 꿈에 실연당했으니까요. 아마 이 필름을 공개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비밀 프로젝트도, 차장님도, 모두 다 곤란해지겠죠.”

그가 웃었다.

“이걸 찍고 나서 분명히 알게 된 게 한 가지 있어요. 그게 뭔 줄 아십니까?”

대표는 미도를 바라봤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이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전 제가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걸 해야 행복하다고 누군가 얘기해주더군요. 이번 일로 그걸 알게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물론 정 차장님도 꿈이 있으시겠죠?”

“네?”

미도가 대표를 바라봤다.

“꿈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대표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런 진지함 때문에 그의 얼굴은 단단해 보였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남자에게 그런 얼굴을 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제 꿈은…….”

말을 멈추고 미도는 창밖을 응시했다. 잔뜩 긴장한 몸에서 미끄러운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버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미도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울렁였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이 조금씩 풀렸다.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미도는 언제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돈을 많이 버는 게 누군가의 꿈이 될 수 있는 걸까. 의사가 꿈이었다가, 디자이너가 꿈이었다가, 별을 헤아리며 지구를 여행하는 천문학자가 꿈이 된 미우를 바라보면서 미도는 꿈이란 철딱서니 없는 무모한 어린애들이나 꾸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런 무모한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닐까. 숨쉬기 힘든 세상에 산소를 만드는 게 아닐까. 미우가 성경처럼 반복해서 읽었던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의 노래처럼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감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감히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며, 감히 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에 이른다는 것’은 꿈을 가진 사람만의 특권이 아니었을까. 자신은 평생 동안 꿈과 목표를 혼동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미도는 마지막으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디트를 보았다. 검은색 화면에 고요히 흐르는 하얀색 이름들을. 그것은 검고 깊은 망망대해를 헤엄치는 아름답고 처연한 반짝이는 물고기 떼 같았다.

“그날 아침 일곱시, 그곳에 들어오는 순간 바로 이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오전 일곱시의 유령들’ 어떻습니까?”

대표가 동의를 구하듯 미도를 바라봤을 때, 그녀의 핸드폰이 반짝거리며 울렸다. 그것은 연달아 두 개의 경고음을 울리며 그녀의 맥박을 빠르게 했다. 미도는 엔딩 크레디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윤사강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문자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그녀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나 최종 합격했대!

미도는 다음 문자 메시지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타인의 슬픔을 착취하는 악당 짓은 그만둬!

-당장 도쿄로 와, 언니!

-합격 기념으로 비행기 표는 내가 예매했어!

사강에게 지중해의 태양은 계절과 상관없이 카탈루냐 지방 남자들의 짙은 눈썹과 눈매처럼 선명하고 뜨겁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 태양 아래에선 날씨에 상관없이 팔을 드러낸 가벼운 옷차림으로 하루 종일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르셀로나 비행을 마친 다음 날 아침, 사강은 반팔 티셔츠 위에 얇은 카디건 하나를 두르고 호텔 주변을 걸었다.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은 채 아직 관광객들이 붐비기 전 람블라스 거리의 오래된 서점과 구불거리는 골목들 사이를 사강은 빠르게 걸었다. 바닷가 쪽에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배가 고프면 꽃을 파는 가게 옆 좌판에서 잘 익은 사과와 망고 하나를 샀고, 티셔츠에 사과를 대충 문질러 먹으며 ‘libro’ 라고 적힌 서점 창가에 보이는 책의 제목들을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가우디의 미니어처 성당을 파는 가게 옆 공원 벤치에 앉아, 남아 있던 망고의 달콤한 과육을 비둘기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사강이 비행 중 체류하는 호텔 밖을 나온 건 정수와 헤어지고 난 후 처음이었다. 서울은 지금 밤일 것이다. 산책을 하는 동안 사강은 몇 번이고 하품을 했다. 기분 좋은 바람을 느끼며 그녀는 오전 열한시, 흑점이 보일 듯 선명한 바르셀로나의 태양 아래에서 지훈에게 빌린 『슬픔이여, 안녕』을 읽었다.

사강은 점심을 잊은 채, 옛날 사람들이 독서했던 고전적인 방식대로 책을 읽었다. 눈이 아닌 입으로 소리를 내며 그녀는 천천히 문장을 따라 읽었다. 책 속의 ‘세실’이 걸음을 멈추면 그녀도 잠시 멈추고, 슬픔에 빠진 ‘안느’가 울면 그녀 역시 눈을 감은 채 그녀의 슬픔을 느꼈다. 사강은 문장을 입으로 읽고, 귀로 듣고, 마음에 새겼다. 책의 문장을 읽는 게 아니라, 그것을 쓴 사람의 마음을 구현해내는 사람처럼 그녀의 눈은 단어와 단어 사이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의 열아홉 프랑수아즈 사강이 느꼈을 감정을 그녀 역시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것, 슬픔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권태라든지 후회, 아주 드물게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알고 있었다. 지금은 비단처럼 신경에 거슬리고 부드러운 그 무엇이 내 위에 도사리고 있어 나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갈라놓는다. 그해 여름,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아주 행복했었다.

 

Posted by 자음과모음 jam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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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eea 2012.06.22 17:47 Address Modify/Delete Reply

    54회가 빠졌는데요 ..